신앙생활

|  천주교란?

2018.03.27 16:59

유혹이 찾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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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를 받고 나서 결심한다.

'그래, 이젠 여간해선 화내지 말고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하지만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기도 하고, 하느님께 맡겨드렸다고 생각했던 일이 걱정거리가 되어 또다시 떠오르고,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현실이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유혹이다!

그것이 유혹임을 즉시 알아차리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다.


'나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나?'

원망을 하다가 반성한다.

'주님, 늘 같은 죄에 걸려 넘어지는 저를 용서하소서.'


▶▶ 많은 이들에게 반복되는 일상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여전히 내가 쥐고 있으려 했다.

하느님 안에서 올바로 살아가는 일은 내 결심으로가 아니라, 매 순간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넘겨드림으로써 이루어진다.



​'화내지 말자'는 다짐보다, 지금 함께 계신 하느님께로 주의를 향하려는 노력이 필요했고,

​'감사하며 살아야지'라는 결심보다, 실제로 하느님께 감사드림이 필요했다.



둘째,

나를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마음속 움직임의 정체가 유혹임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우리 삶은 두 가지 움직임 사이에 자리한다.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움직임(:성령의 작용)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움직임(:유혹)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닮을 수 있는가?

보이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음으로써이다.


"우리의 삶은

성부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성자 예수님을 양성해 가시는 과정"


​-> 즉 우리가 삶에서 겪는 모든 사건과 상황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관하시는 교육과정의 일환으로써,

그 교육의 목표는 단 한 가지, 즉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배우는 것은

'하느님을 닮은 삶'이라는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엄청난 자유를 주시면서 단 하나의 금령 -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열매를 따 먹으면 안된다."- 을 주셨다.

그러나 유혹은 하나뿐인 금령을 어기도록 부추겼다.


인간이 받은 소명은 '하느님을 닮는 것'인데, 유혹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하느님처럼 되라'는 것이다.

이는 '네가 하느님이 되라'는 것으로, '하느님이 아니라 너 자신을 섬기라'는 유혹이다.


사람은 왜 유혹에 넘어갔을까? 

첫째, 유혹의 말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다.


둘째, 시선을 유혹으로 돌렸다.

쳐다보니 과연 그 나무 열매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이고 탐스러웠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되뇌는 말의 지배를 받고, 우리가 자주 바라보는 대상을 섬기게 된다.


하느님 말씀을 되뇌고 하느님을 바라볼 때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지만,

다른 말을 되뇌고 다른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다.

나를 화나게 하는 말, 나를 섭섭하게 한 말을 곱씹는다면,

그 말이 나를 다스리라고 허용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것더러 나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오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 위를 걸어 갔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워져 물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시선을 예수님에게서 돌려 유혹과 시련으로 향하자, 그것에 빠져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선을 주님께로 향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든 눈앞에 무엇이 있든, 주님 말씀을 되뇔 때 시선을 그분께로 향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유혹을 물리치셨는가.​

<참고>

http://rosario.pe.kr/220619735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