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  본당신부의 복음말씀 한마디

어떻게 복음의 기쁨을 살 것인가?

posted Feb 14, 2020

어떻게 복음의 기쁨을 살 것인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개신교 신자였다. 내가 사제라는 것을 알고는 대뜸 묻는다. “천주교 신자들은 구원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한다면서요?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표지는 바로 예수님이다. 하느님은 당신 독생 성자 예수님까지도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구원의 기쁨을 살아야 된다. 이는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인 관점이다.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라고, 기쁨을 전면에 내 세운다. (데살로니카 전 5, 16이하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슬픔과 고통. 좌절과 패배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참된 기쁨,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음의 기쁨을 어떻게 살 것인지 배워야 할 것이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무엇을 기쁨으로 여기는지? 무엇을 행복으로 여기는지? 무얼 가져서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면 예수님과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모든 이와 친구가 되어 형제애와 사랑을 나누고 그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좋겠다.

 

기쁨의 비결

 

기쁨의 비결은 시선의 정화에 있는 것 같다. 잘 들여다보고 오랫동안 보는 것이다. 사랑스럽게 보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어버이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교종은 이런 시선을 관상의 시선이라고 하셨다. 나태주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제가 만나는 장애인 친구들이 있다. 밀밭모임이다. 회원 중에 신학생 때부터 만난 형제가 있으니 가히 30년을 훌쩍 넘긴 모임이다. 회원 중에 아가다는 얼굴에 붉은 점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계속 만나고 찬찬히 보니 숨겨있는 원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학인이는 뇌병변 1급장애자다. 젊어서는 자신의 장애가 원망스러웠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장애가 고맙다는 것이다. 이유는 장애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는 것, 이것이 그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라니 놀랍다. 장애도 오랫동안 함께 하다보면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인가 보다. 그는 언제나 유머를 구사하며 쾌활하게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준다. 다운 증후군, 강철과 주언이는 친절한 신사들이다. 만나면 항상 먼저 다가와 안아주면서 말한다. “신부님 사랑해요. 보고 싶었어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친구들의 놀라운 친화력을 나도 배우고 싶다. 하느님도 이 친구들을 보고 미소 지을 것 같다.

 

여러 번 병자성사를 준 암환자 프란치스코형제가 생각난다. 이번이 마지막이려니 생각하면서 성사를 주고 일어나려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자기와 함께 좀 있어달라는 것이었다. 얼마를 앉아있었을까? 그가 나를 놓아주며 말하였다. “신부님은 정말 내 친굽니다.” 예수님이 너는 내 친구라고 하는 말로 들렸다. 황홀한 기분이었다. 아주 잠시 함께 그와 같이 있었을 뿐인데 엄청난 영광을 받았다.

 

밀밭 회원 바오로의 여동생, 순애씨는 조현병환자다. 바오로 형제의 집에서 모임을 할 때였다. 좁은 방에서 순애씨는 구석으로 내몰려 시종 무표정으로 쉼 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 하며 한 말씀을 청했다. 그녀는 괜찮다하며 방긋 미소 지었다. 뜻밖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나는 밖에 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순애씨에게 큰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번에는 순애씨가 커다란 함박웃음으로 응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까 미소도 그랬지만 함박웃음은 전혀 예기지 못한 일이었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행복했다. 나도 모르게 보잘 것 없는 이를 소중하게 대해 주님을 알현한 느낌이었다. 작은 이 하나를 당신과 동일시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당신 고향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청소부들을 만났다. 그들은 교종의 착좌식 때 초대받은 유일한 그룹이다. 그들은 교종을 이렇게 평한다. “베르골료는 우리 친구입니다.” 교종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 그렇다고 가난한 이들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복음화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하도록 그들에게 다가가고 시간을 내주고 경청하고 오랫동안 만나야 된다. 즉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일회적인 만남이나 단순히 시혜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고 기쁨도 없고 배울 수도 없을 것이다.

 

소박한 예수님을 통해 기쁨을 배우자.

 

예수님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당신 자신도 철부지임을 감추지 않으신다. (마태 11) 바오도사도도 주님의 힘이 자신에게 머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별빛은 어둠속에서 빛난다. 약한 자안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약함이 기쁨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고통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고통을 생명을 낳는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신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기쁨 역시 가득했다. 특히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큰 기쁨을 누리며 우리에게도 그 기쁨을 맛보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 1511절에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가수 송창식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의 나쁜 것은 실은 다 좋은 것이다.” 선문답 같은 말이지만 신앙의 차원에서 한 말이다. 우리의 기쁨은 파스카적인 기쁨이다. 십자가와 고통은 우리 신앙인의 영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억지로 고통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일상을 기쁘게 살다가 고통이 주어진다면 그 때 파스카적인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고통이 주어질 때 놀라지 말고 그것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바오로사도는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낸다.’(로마 5, 3)고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진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여겨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우리 본당 베로니까 자매의 고백이다. “... 남편은 주벽이 여전하고 아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시어머니는 가출하고 이중 삼중 고통이 내게 몰아닥쳤다. 순간순간 속상하고 약 오르고 육신은 쓰러질 것 같이 한 없이 지치긴 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늘 행복과 평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 때가 내 일생 중 가장 사랑이 많았던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베로니카 자매는 그 힘든 때가 가장 사랑이 많았던 때라고 회상한다. 가족들을 사랑했고 아울러 수난으로 고통 받으시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고통이 아니라 사랑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사랑이 있다면 고통도 달게 받고 기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는가.

 

공동체에서 기쁨 살기

 

예수님은 밀밭의 가라지를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기다려라 말씀하신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애 대한 판단은 끝까지 유보하라는 의미다.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서도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느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악까지도 이용하신다. 이것이 죄의 신비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를 복된 탓이라 했다. 바오로 사도는 죄 많은 곳에 은총이 풍부하다고 말한다.(로마 5, 20참조) 공동체에 끊임없이 화합과 일치를 주장하는 내 목소리가 불협화음이 될 수도 있다. 열두 사도단에 유다가 들어있음을 잊지 말자.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넘쳐나 멸망했다. 그런대 정확하게 말하면 의인 열 사람이 없어 멸망한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죄악이 아니라 의인을 볼 필요가 있다. 세상과 교회의 악을 핑계 삼아 삶의 기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너무 자신을 다그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세상 구원을 책임질 일도 아니다. 기쁘게 할 일을 하고 그 다음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 할뿐이라고 말한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보여주는 삶은 단순해 보인다. 그들은 모든 걸 내어 놓고 그저 이집 저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받았고 주님께서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는 것이다. (사도 2, 44이하 참조) 주님께서 해주셨다는 말이 와 닿는다.

 

마지막으로 자연을 통해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수십만 년 아니 더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스럽게 자세히 본다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예언자는 자연 사물, 하나하나를 들어 그들이 얼마나 큰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지를 들려준다. (다니엘 3) 하늘에 태양이 떠있고, 바람이 초목을 흔들고, 낮과 밤이 교차하고, 춥고 덥다면, 그건 바로 우리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축복한다는 징표일 것이다. (2020년 경향잡지 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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